정보성

담양 10정자 소개

jcera1 2022. 3. 18. 00:42
반응형

오늘은 빼어난 경관과 절경을 자랑하며, 편안한 여행의 쉼터가 될 담양 10 정자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1. 식영정

식영정은 정면 2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며 특이한 것은 한쪽 귀퉁이로 방을 몰아붙이고 전면과 측면을 마루로 두고 있다는 점이다. 서하당 김성원(1525-1597)이 명종 15년(1560)에 창건하여 장인인 석천 임억령(1496-1568)에게 증여한 것으로, 송강 정철(1536-1593)은 이곳 식영정과 환벽당, 송강정 등 성산 일대의 미려한 자연경관을 벗삼아 『성산별곡』을 창작했다. 식영정 옆에는 1973년 송강집의 목판을 보존하기 위한 장서각을 건립하였으며, 1972년에는 부속건물로 부용당, 성산별곡 시비가 건립되어 있다. 1972년 1월 29일 인근 환벽당, 송강정 등과 함께 <정송강유적-식영정>으로 지방기념물 제1호로 지정되었고, 2009년 9월 18일 명승 제57호로 승격 지정되었다.
 

2. 소쇄원

 
소쇄원은 양산보(1503∼1557)가 은사인 정암 조광조(1482∼1519)가 기묘사화로 인해 능주에 유배되어 세상을 떠나게 되자 출세의 뜻을 버리고 자연 속에서 숨어 살기 위하여 꾸민 별서정원 입니다. 주거와의 관계에서 볼 때에는 하나의 후원이며, 공간구성과 기능면에서 볼 때에는 입구에 전개된 전원과 계류를 중심으로 하는 계원 그리고 내당인 제월당을 중심으로 하는 내원으로 되어 있다. 소쇄원은 조선시대 대표적 정원의 하나로 제월당, 광풍각, 애양단, 대봉대 등 10여개의 건물로 이루어졌있었으나 지금은 일부만 보전되고 있다.
 

3. 면앙정

 
1533년(중종 28) 송순(1493~1583)이 건립되어 이황(1501~1570)을 비롯한 강호제현들과 학문을 논하며 후학을 길러내던 정자로서 1972년 8월 7일 전라남도기념물 제6호로 지정되었다. 봉산면 제월리 제봉산 자락에 자리잡은 이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형태에 추녀 끝은 4개의 활주가 받치고 있다. 목조 기와집으로 측면과 좌우에 마루를 두고, 중앙에는 방을 배치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여러 차례 보수한 것이며, 1979년에는 지붕의 기와를 교체하였다. 최초의 모습은 초라한 초정으로 바람과 비를 겨우 가릴 정도였다고 한다. 송순은 면앙정 가단을 이루어 많은 학자·가객·시인들과 함께 면앙정을 시가 창작의 산실로 만들었다. 정자 안에는 이황·김인후·임제·임억령 등의 시편들이 판각되어 걸려 있는 이곳은 송순의 시문활동의 근거지이며, 당대 시인들의 교류로 호남제일의 가단을 이루었던 곳이다.
 
 

4. 명옥현

 
조선 중기 오희도(1583~1623)가 자연을 벗삼아 살던 곳으로 오희도의 넷째 아들 오이정(1619-1655)이 자연경관이 좋은 도장곡에 헌을 짓고 이를 명옥헌이라 이름지었다. 오이정은 스스로 호를 장계라 한 바 장계정이란 이름은 여기에서 유래한다. 그 후 100여년이 지나 정자가 퇴락함에 따라 후손 오대경이 다시 중수하였다. 건물 앞뒤에는 네모난 연못을 파고 주위에 꽃나무를 심어 아름답게 가꾼 정원으로 소쇄원과 같은 아름다운 민간 정원으로 꼽힌다. 명옥헌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아담한 정자이다. 교육을 하기 위한 적절한 형태로 건물이 지어져 있다. 건물을 오른쪽으로 끼고 돌아 개울을 타고 오르면 조그마한 바위 벽면에 ‘명옥헌 계축’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건물 뒤의 연못 주위에는 배롱나무가 있으며 오른편에는 소나무 군락이 있다. 명옥헌 뒤에는 이 지방의 이름난 선비들을 제사지내던 도장사의 터가 남아 있다.
우리나라의 옛 연못이 모두 원형이 아니라 네모 형태를 한 것은 세상이 네모지다고 여긴 선조들의 생각에서 비롯되었다. 또한 계곡의 물을 받아 연못을 꾸미고 주변을 조성한 솜씨가 자연을 거스리지 않고 그대로 담아낸 조상들의 소담한 마음을 그대로 반영하였다. 소쇄원이 그러하듯이 이 명옥헌의 물소리도 구슬이 부딪쳐 나는 소리와 같다고 여겨, 명옥헌이라고 하였다. 건물에는 명옥헌 계축이라는 현판과 더불어 삼고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명옥헌의 오른편에는 후산리 은행나무 또는 인조대왕 계마행이라 불리는 은행나무가 있다. 300년 이상된 노거수로 인조가 왕이 되기 전에 전국을 돌아보다가 오희도를 찾아 이곳에 왔을 때 타고온 말을 매둔 곳이라 해서 이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5. 송강정

 
송강 정철은 선조17년(1584)에 대사헌이 되었으나 동인들이 합세하여 서인을 공박함이 치열해지자 마침내 양사로부터 논척을 받아 다음해 조정을 물러나자 이곳 창평으로 돌아와 4년 동안을 평범한 인간으로서 또한 시인으로서 조용한 은거생활을 했다. 여기서 그는 사미인곡을 썼던 것이다. 『송강별집』권7 기옹소록에라는 기록을 보면 양사미인곡 제작은 창평으로 돌아온 해로부터 2∼3년 뒤가 된다. 『사미인곡』은 제명 그대로 연군지정을 읊은 노래이다. 그 수법은 한 여인이 남편을 이별하고 사모하는 정을 기탁해서 읊은 것인데 송강 자신의 충정을 표현한 노래라 하겠다. 심각한 실의에 빠져 있었던 때이라 송강은 이때 세상을 비관했고 음주와 영탄으로 이곳에서 세월을 보냈던 것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골기와 팔작지붕 건물이다. 중재실이 있는 구조이며 정면엔 송강정 측면엔 ‘죽록정’이란 현판을 가지고 있다. 건물규모는 정면 3칸, 측면 3칸이고 단층 팔작지붕 기와집이다. 중재실이 있는 구조로, 전면과 양쪽이 마루이고 가운데 칸에 방을 배치하였다. 정각 바로 옆에는 1955년에 건립한 《사미인곡》 시비가 있으며, 현재의 건물 역시 그때 중수한 것이다.정자의 정면에 ‘송강정’이라고 새겨진 편액이 있고, 측면 처마 밑에는 ‘죽록정’이라는 편액이 있다. 둘레에는 노송과 참대가 무성하고 앞에는 평야가 펼쳐져 있으여, 멀리 무등산이 바라다보인다. 정자 앞으로 흐르는 증암천은 송강 또는 죽록천이라고도 한다.
 
 

6. 독수정

 
독수정을 창건한 서은 전신민은 고려말 공민왕대에 북도안무사 겸 병마원수를 거쳐 병부상서를 역임하였고, 고려가 멸망하자 두문동 72현과 함께 두 나라를 섬기지 않을 것을 다짐하며 이 곳에 은거하면서 정자를 지었다고 전한다. 현재의 독수정 건물은 고종28년(1891)에 후손에 의해 재건된 것이며, 1915년에는 떼지붕을 기와지붕으로 바꾸고 1972년 중수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으며 정자주변의 원림은 지방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전신민은 계류가 흐르는 남쪽 언덕 위에 정자를 짓고 후원에는 소나무를 심고 전계에는 대나무를 심어 수절을 다짐했다. 독수정역은 진입로에 중국원산종인 회화나무, 자미나무 등의 노거수가 심어져 있고, 정의 앞에는 자미나무, 매화나무 등 중국원산종의 수목이 심어져 있는데 그 크기로 보아 1890년대 중건 당시에 심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조경적인 측면에서 볼 때 고려시대에 성행했던 산수 원림으로서의 기법을 이 지방에 도입하는데 선구적인 역할을 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7. 상월정

 
1984년 2월 29일 전라남도문화재자료 제17호로 지정된 상월정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규모로 팔작지붕에 한식 기와를 얹은 건물이다. 4칸 중 좌우는 방으로, 중앙 2칸은 마루를 깔아 강당 형식으로 사용하고 있다. 막돌로 쌓은 기단 위에 덤벙주춧돌을 놓고, 원형기둥을 세웠다. 기둥머리에는 창방을 걸치고, 보아지를 직각방향으로 끼워 넣은 다음 주두를 얹었다. 주두 위에는 다시 우미량형의 툇보를 걸쳤으며, 장여받침 굴도리를 받친 민도리집 형식이다.
조선 세조3년(1457) 언양인추재 김자수가 벼슬을 사임하고 고향인 이곳에 돌아와 대자암 터에 상월정을 창건하였다가 손자사위인 함풍이씨 덕봉 이경에게 양도하였다. 그 후 이경은 사위 학봉 고인후에게 다시 양도하여 줌으로써 김(金), 이(李), 고(高) 3성(姓)과 기연을 지니게 된 것이다.
 

8. 연계정

 
1570년(선조 3)에 건립된 연계정은 미암 유희춘(1503~1577)의 강학장소로서 벼슬에서 물러나 이곳에 머물며 교육을 하였던 곳이다. 미암 유희춘은 조선전기의 대표적인 생활일기인 『미암일기』의 저자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원래 해남 출신이었다.그는 후에 담양으로 이거하게 되는데, 당대의 여류문인이었던 담양출신 송덕봉과 혼인한 때문이었다. 유희춘이 살았던 16세기의 혼인풍습은 고려의 남귀여가혼 풍습이 강하게 남아있었기 때문에, 남성이 혼인한 후에 처변에 거주하는 일이 많았다. 그 또한 당시의 풍속에 따라 해남에서 처가가 있던 담양으로 이거하여 정착하였던 것이다.그는 하루하루 일상을 소중하게 생각하였다. 그래서 빠짐없이 기록하였다. 무슨 편지를 받거나 어떤 소식을 들으면 놓치지 않았다. 집안 살림살이는 물론 자신에게 흠이 되는 일도 빠뜨리지 않았다. 병들어 누웠을 때에도 그치지 않았다. 『미암일기』는 자상하고 근실한 생활의 소산이었다. 유배가 끝나고 조정에 나온 선조 1(1567)년 10월부터 세상을 떠나기 바로 직전인 선조 10(1577)년 5월까지 10년 간의 일기가 현재 남아 있다. 아마 이전의 유배지의 일기는 없어졌을 것이다. 일기는 양이 방대할 뿐만 아니라 내용도 다양하여 조선중기 선비의 생활과 향촌사회의 모습을 소상히 전해주고 있다. 또한 조정의 대소사도 빠지지 않고 기록하였다. 때문에 임진왜란으로 승정원일기 등 선조대 초반의 기록이 다 불타버리자, 광해군대 선조실록을 편찬하면서 『미암일기』를 기초 사료로 활용할 정도였다. 『미암일기』는 현재 보물 26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담양 대덕면 장산리의 종택에 있는 모현관에 보관되어 있다. 현재 새로운 유물관이 건립 중에 있다.
 

9. 관어정

 

나산마을에는 조선 숙종 때 함양 박 씨 문서에서 가산 마을에 축조하였다는 저수지 한가운데 섬에 있으며, 그 섬 안에 있는 정자가 관어정이다. 저수지는 연꽃 자생지로 유명하며, 섬과 연결된 철교가 있다.

 

10. 남극루

 

2003년 6월 30일 담양군향토유형문화유산 제3호로 지정된 남극루는 1830년대에 고광일을 비롯한 30여 명에 의해 건립된 누각으로,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면 삼천리 하삼천 마을 논 가운데에 있다. 원래 담양군 창평면 창평리 면사무소 앞의 옛 창평 동헌 자리에 있었으나 1919년 현재의 자리로 옮겨 세운 것이라 한다. 정면 3칸·측면 2칸의 2층 누각 형식 팔작지붕으로, 담양 지방에서는 보기 드물게 평지에 세운 정자이며, 여타의 정자들보다 규모도 크다. 외벌대의 기단에 높은 누하 기둥을 세웠고, 2층에는 이보다 가는 원기둥을 세웠다. 가구는 5량 가이고, 천장은 연등천장으로 구성되었다. 지금은‘남극루’ 현판은 물론 기문 또는 중수기 등 아무런 현판도 걸려 있지 않으나 현판을 걸었던 흔적은 여기저기 남아 있다.

 

이상 담양 10정자에 대해 살펴봤습니다. 

반응형